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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진달래의 향연...봄의 왈츠 천보산

천보지맥, 왕궁 사찰 회암사지 품에 안아
녹양역~회암사지박물관 18.5km 등산

 

theTAX tv 채흥기 기자 | 천보산에는 온통 진달래꽃이 어우러져 봄의 왈츠를 추고 있었다.

 

경기도 의정부와 양주시, 포천시에 연해있는 천보산은 해발 337m로 그리 높은 산은 아니다. 의정부 금오동과 양주시 마전동에 연해있는 등산로 초입에서부터 칠봉산 인근까지 지맥처럼 길게 늘어져 있다. 동두천 와방산과 천보산을 이어 왕방지맥으로도 불리는 지류이다.

 

의정부 방향에서 천보산을 오르는 길은 녹양역에서 오르는 두 길이 있다. 하나는 녹양역에서 중랑천을 건너 우측 횡단보도를 건너면 등산로 입구가 나타나고, 또 하나는 좌측 양주시 마전동 방향 2km 정도 걸으면 등산로 입구가 나타난다. 우린 초행이라 마전동 방향에서 오른다. 산이 높지 않아 조그만 오르면 능선이 나타난다. 초입부터 진달래꽃이 여기저기 반겨준다.

 

약 13km 정도를 가니 1차 목표지점인 어하고개이다. 양주시와 포천 송우리를 오가는 도로가 나 있다. 어하고개 생태탐방로를 지나 가파른 산을 오르면, 넓은 산책길 같은 길이 나타난다. 등산객이 자주 보인다. 나무계단을 오르니 정상에 천보정에 자리 잡고 있다. 잠시 휴식을 하면서 간식으로 에너지를 보충했다. 천보정 인근에는 진달래꽃이 아주 많이 피어 멋진 풍경을 선사한다. 천보정에서 잠시 쉬어가는 등산객들도 있다.

 

다시 길을 재촉해 2km 정도 왔을까 천주교 공원묘지에 벚꽃이 끝물이다. 회암고개 400m 전방에서 카페 방향으로 내려왔다. 양주시와 포천 송우리를 잇는 아스팔트 길이 나타났다. 이 길은 일제 강점기 때 건설되었다 한다. 창자처럼 구불구불 내려오다보니 꾀꼬리고개라는 표지석이 서 있다. 옛 이름을 기록하기 위해 세웠다 한다.

 

오늘 등산은 양주회암사지박물관까지 18.5km 마무리했다.

 

양주회암사지박물관은 2012년 10월19일 개관했으며, 왕실사찰이었던 회암사가 조선 중기에 화재로 소실된 후 터만 남아있었는데,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 전시와 교육기능을 겸하고 있다.

 

유물로는 수막새, 토수, 용두, 청동금탁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천보산은 다른 이름으로 갈립산이라고도 부른다. 하늘아래 보배로운 산이라 하여 천보산이라 불려지게 되었다 한다.

 

특히, 천보산은 조선초기 왕사였던 회암사가 있었던 곳으로 현재는 터만 남아있고, 바로 옆에는 회암사지에서 발굴된 각종 문화재를 전시한 회암사지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

 

이와 함께 방랑시인 김삿갓이 태어난 곳이 회암사지 인근 회암동이기도 하다.

 

10여분 오르니 능선이 나타나고, 등산객 서너명이 보인다. 기온은 23도 정도로 초여름 날씨이다. 조금 가다보면 오르막 전 소림사라는 작은 암자가 보이고 정상에 서면 통신탑이 있는 천보산(337m) 정상이다. 데크에서 서쪽을 보니 의정부종합운동장이 보이고, 북쪽에는 양주시청 뒤에 불곡산과 칠봉산이 보인다.

 

오늘의 코스는 의정부 녹양역~양주시 마전동 등산로 입구~천보산 정상~축석령~어하고개~천보정~천주교공원묘지~회암고개~양주회암사지박물관까지이다. 거리는 18.5km, 걸린시간은 6시간 4분이었다.

 

참고로 양주시 회암동에 있는 사적 128호 회암사지는 고려 축숭왕 15년(1328)에 원나라를 통해 고려에 온 인도의 고승 지공이 지었고, 우왕 2년(1376)에 나옹이 중창했다.

 

조선 전기까지 건물만 262칸, 승려 3,000명으로 전국에서 가장 큰 절 가운데 하나였다. 딸린 암자가 17개나 되었고, 관음상도 10척이나 되어 당시 동국 제일로 이런 규모의 절은 중국에서도 많이 볼 수 없을만큼 거대했다. 조선 중기에 숭유억불정책으로 불태워졌다. 이성계가 상왕으로 불러난 후 궁실을 짓고 기거했던 왕사였다. 현재 터에는 왕궁같은 기단석이 남아있으며, 터를 보면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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